미국여행 댈러스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음 행선지는 엘 파소 El Paso였다. 당초 여행 계획은 샌 안토니오에 내려 하루를 보내기로 했지만, 샌 안토니오의 에어비앤비 숙소값이 너무 비쌌다. 엘 파소와 비교하면 거의 2배 차이.
26시간 25분 ㄷㄷ
때문에 댈러스 숙소에서 뒹굴거리며 샌 안토니오 숙소를 찾다가, 그냥 엘 파소로 직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기차를 타고 버텨야 하는 시간은 대폭 늘어났지만, 그래도 이름부터 낯설고 숙소비도 저렴한 엘 파소에 대해 정보를 찾아볼 수록 꽤나 괜찮은 여정이 될 것 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확신의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엘 파소 치안' 이었다. 지금까지 시카고와 댈러스를 지나오면서 꽤나 많은 홈리스와 마약 중독자들을 마주쳤고, 자연스레 치안에 대한 걱정이 늘어가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댈러스로 이동할 때, 경유지로 세인트 루이스를 패스한 이유도 치안이기도 했다.
엘 파소의 치안을 알아본 결과... 몹시 훌륭했다.
강 하나 건너에 멕시코의 도시 후아레즈가 있는데, 이 곳은 마약 밀수 등의 이유로 굉장히 치안이 안 좋은 동네라고 한다. 이것의 반대급부로, 미국에서 인접 도시의 치안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강화되어 엘 파소엔 무려 국경수비대, 경찰, FBI지사가 모두 존재한다고 한다. 옆집이 위험하니 거꾸로 엄청나게 안전해진 동네... 대단하다 엘 파소!
엘 파소로 출발!
기차에서 보낸 32시간
치안이 훌륭하다는 정보를 얻은 후, 가벼운 마음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서 싱글벙글 기차여행을 재개했다. 기차 매점에서 도리토스도 하나 사오고, 댈러스 마트에서 사온 샌드위치까지 더하니 훌륭한 한 끼가 준비됐다. 노래도 듣고 책도 읽으며 신나게 보낸 시간도 잠시...
6시간이 흘렀다.
시카고에서 댈러스까지 올 때도 약 20시간동안 기차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땐 이렇게 피곤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댈러스에서 엘 파소를 가는 동안은 시간이 정말 안 가더라. 아마 이전 기차에서 읽을 책, 영상, 게임을 다 끝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이 지루함마저 예측한 시간때우기의 천재. 마법의 물약을 준비했다.
나에게 즐거움과 용기를 주입해주는 마법의 황금약. 바카디 골드 럼이다. 댈러스 숙소 앞 리쿼 스토어에서 이 지루함을 예측하고 하나 구매한 내가 너무 대견스러웠다.
기차에서도 맥주와 위스키 등의 주류를 판매하고 있거니와, 딱히 사고만 안 치면 따로 술을 가지고 탑승하는 건 크게 지장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기차 매점에서 물과 플라스틱 잔을 하나씩 가져와서 홀짝거리다 석양과 함께 잠에 들었다.
지옥같은 기차 연착
늦은 밤, 잠에서 깨자마자 난 기차가 멈춰있다는 걸 알아챘다. 대도시의 역에선 15분~20분정도 정차하는 일도 많았기에 별 생각 없이 다시 잠을 청했는데, 자다 다시 깼는데도 여전히 기차는 멈춰있었다. 이런 재앙이 있나
역무원에게 물어본 결과, 기차 앞 선로에서 직원들이 정비 업무를 하고 있어 지연이 되고 있다고 전해들었다. 얼마나 더 걸릴지도 모른다고. 기차가 움직이는 2시간보다 멈춰있는 1시간이 더더더더욱 힘들고 지루했다.
기차에서 아픈 허리와 엉덩이를 들썩이다보니 어느새 해가 어스름히 고개를 드는 시간이 됐다. 그 때 쯤 기차 전체에 울리는 안내소리.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고, 식사를 예약한 침대칸 이외에도 코치coach칸(일반칸) 승객들도 원한다면 식사를 구매할 수 있다는 방송이었다.
함께 여행을 떠나는 룸메이트는 말을 걸어도 잠에서 깰 기미가 없기에 나 혼자 밥을 먹으러 이동했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암트랙 시그니처 프렌치 토스트 with 소시지"다.
빵 위에 시럽이 부어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내가 따로 시럽을 조절해 먹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여행 중, 브런치 가게에서 먹었던 프렌치 토스트는 너무 달아서 먹기 힘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 방식이 오히려 좋았다. 밤새 쫄쫄 굶다가 먹은 아침은 역시 꿀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후, 룸메이트 친구가 일어났길래 카페칸에서 간식을 사다 가벼운 아침을 때웠다. 사실 나에게 프렌치 토스트는 약간 배고픈 감이 있었기에... 또 먹는다 또 먹어. 황량한 사막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풍경은 날씨가 변할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었고 덕분에 창 밖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엘 파소에 인접하니 몰아치는 모래바람이다. 방금 전 사진과 풍경이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영화에서나 보던 사막의 모래바람을 눈 앞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날 바람도 강하고 날씨도 당연히 건조하여 엄청난 모래바람이 도시를 뒤덮었다.
그리고 이 풍경과 함께 들려오는 열차장의 방송도 재밌었다.
"기나긴 황무지를 지나 문명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며, 긴 여정 끝에 역에 내려 신선한 공기...는 없지만 어쨌든 공기를 즐기세요!"
모래바람과 긴 탑승으로 지쳐있던 몸에 으찌됐든 힘이 되는 농담이었다.
엘 파소 도착
무거운 몸과 첫 타코
엘 파소 역에 도착한 건 탑승으로부터 32시간이 지난 후였다. 다시 말하지만 32시간... 너무너무 힘들었다.
박살날 것 같은 허리를 부여잡은 채 모래바람을 뚫고, 역 근처의 음식점에 비틀비틀 도착했다. 시간은 어느새 늦은 저녁이라,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았기에 이 곳을 찾는 것마저 힘들었다.
그렇게 주문한 음식인데, 어떤 메뉴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대충 타코 정식같은 느낌이다. 타코 하나, 고추튀김 하나, 치즈가 들어간 또띠아 롤 하나, 밥과 콩 수프. 소오올직히 맛은 그저 그랬지만, 배고프고 지친 우리에겐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여차저차 식사를 마치고 바로 숙소에 들어가 기절하듯 잠들었던 첫 날이다.
엘 파소 일정 시작
꼬질한 나와 타코, 타코 그리고 타코
엘 파소에서 맞이한 첫 아침. 다행히 자고 일어나니 모래바람은 전부 사라졌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엘 파소의 다운타운을 걷다보니 벽화가 그려져 있는 구간이 있었다. 건물 벽에 써 있는 문구는 해당 길이 "엘 파소의 예술의 길" 같은 느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곳에서 칠가이 벽화를 발견했는데 마침 "꼬질하고 지쳤지만 즐겁게 산책하는 나도 칠가이!" 라는 생각으로 사진을 하나 찍었다.
엘 파소에서 구글맵으로 검색한 음식점은 80% 이상이 타코 레스토랑이었다. 엘 파소에서 체류하는 동안 꽤나 많은 타코를 먹었는데, 위 사진의 타코가 가장 훌륭했다.
음식점 이름은 타코네타Taconeta로 2번 방문하는 동안 항상 손님이 많았다.
왼 쪽의 사진은 소고기 브리스킷이 들어간 타코, 오른쪽은 닭고기 타코, 위는 고구마 오븐구이다. 입이 꽉 차는 느낌과 감칠맛이 가장 뚜렷하게 느껴졌던 타코집이라 기억에 특히 남는다. 구체적인 맛을 묘사하기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때 굉장히 만족스럽게 먹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다.

또 기억에 남은 건, 엘 파소는 노점상도 타코, 레스토랑도 타코, 사방이 그냥 타코다. 게다가 난 미국에 있는데, 마주치는 대부분 사람은 히스패닉이다. 심지어 그들 끼리는 영어보다 스페인어를 자주 쓴다!
편의점에 들어가니, 주인과 단골 손님은 스페인어로 대화하고 있었고 음식점에선 우리 빼고 대부분 사람들이 스페인어로 음식을 주문했다. 무우울론 영어를 쓰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겪었던 미국 도시와 느낌이 너무 달랐다.
엘 파소의 야경
풍경도 다른 미국 도시와 꽤나 다르다. 고층 건물은 쉽게 찾아볼 수 없고, 건물의 모양이 지금까지 봐왔던 미국과 캐나다의 집들과는 사뭇 다르다. 뭐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지만, 누군가 표현한 "미국 속의 멕시코"라는 말이 어째서 나왔는지 체감되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내가 넓고 넓은 미국 땅을 제대로 여행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당시 여행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숙소로 돌아가는 언덕 위에서 밤 풍경을 내려다보는 흥취가 있어, 해가 질 때마다 주변 산책을 반복했었다.
휘영청 밝게 뜬 달과 지평선 너머까지 반짝이는 엘 파소의 밤 풍경이다. 황금빛과 백색으로 빛나는 도시의 야경과는 사뭇 다르다. 조금 더 알록달록한, 마치 축제가 열리는 곳의 조명같았다. 조금 어두운 곳으로 이동하면 별도 꽤나 많이 보였는데 안타깝게도 사진에 담기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텍사스 명물 왓어버거Whataburger
밤거리를 걷다가 왓어버거 프랜차이즈가 보여 들어와봤다. 텍사스의 명물이자, 텍사스다운 버거 프랜차이즈라는 평이 있는 곳이기에 나름 기대가 있었다. 내가 방문한 곳은 버거를 받아 테이블에 앉아있으면, 직원들이 트레이에 케찹과 할라피뇨 케찹을 담아서 돌아다니며 나눠주었다.
직원이 지나갈 때, 개수와 종류를 선택하는 방식인데 나는 감자튀김을 케찹 없이 먹는 걸 선호하는 터라 할라피뇨 케찹을 먹어보진 않았다.
내가 주문한 건 더블 패티가 들어간 기본 버거. 내 룸메이트는 뭐시기 멜트 버거를 주문했는데, 할라피뇨가 들어간 치즈가 녹진녹진하더라.
버거는 와퍼만큼 크고, 빵에 발린 머스타드와 치즈의 조합이 훌륭했다. 개인적으로 버거킹의 와퍼보다 훨씬 맛있었다. 아마 가격도 더 저렴하지 않았나 싶다.
엘 파소를 떠나며 찍은 동영상
뻘쭘하지만, 엘 파소에선 볼 게 딱히 없었다. 내가 렌트카를 빌려 주변을 운전하여 다닐 수 있었다면, White sand 국립공원을 가보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명의의 신용카드가 없어 렌트카를 빌리는 게 불가능했다... 슬픈 뚜벅이 여행.
그래도 엘 파소는 약 3주간의 미국여행 중 훌륭한 힐링장소로 기억에 남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저렴한 물가도 한 몫 했다. 숙소비도 저렴하고 식비도 다른 대도시에 비하면 체감상 약 30%는 저렴했던 것 같다.
좋은 날씨와 낮은 인구밀도로 인해 모두가 여유로운 도시. 그리고 야경이 정말 아름답던 도시. 엘 파소 여행은 맛있는 음식과 휴식으로 가득 찬 채 마무리됐다.
그렇게 이번 미국 여행의 마무리이자 하이라이트, LA와 캐니언 투어를 향해 기차를 타고 긴긴 시간을 또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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